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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복습) 개항기 공무원시험준비 복습중 한능검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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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복습 문제
(한국사복습) 개항기 공무원시험준비 복습중 한능검준비


같이 해보겠습니다. 틀린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정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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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한국사 흐름 정리 문제 (정답 포함)


1️⃣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

Q1.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은?
→ 조미수호통상조약 (1882)

Q2. 이 조약의 내용 중 옳은 것을 O/X로 고르시오:

항목 정답

거중조정 O
관세 자주권 최초인정 O
최혜국 대우 최초인정 O




2️⃣ 내지무역이 가능해진 조약

Q3. 내지무역(내륙 무역)이 가능해진 조약은?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2)

Q4. 이 조약의 결과로 옳은 것을 O/X로 고르시오:

항목 정답

청 상인의 내지 진출 허용 O


3️⃣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Q5. 관세 자주권과 방곡령 선포권이 처음 인정된 조약은?
→ 조일통상장정 개정 (1883)

Q6. 이 조약의 결과로 일어난 일 (O/X):

항목 정답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 마련 O
방곡령(곡물 수출 금지령) 선포 가능 O


4️⃣ 최혜국 대우와 이권 침탈

Q7. 최혜국 대우로 인해 ( 아관파천 ) 이후 열강의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Q8. 러시아가 가져간 이권은?
→ 삼림 채벌권, 절영도 조차 요구

Q9. 미국이 가져간 이권은?
→ 운산금광 채굴권, 경인선 철도 부설권



5️⃣ 화폐 침탈과 금융 종속

Q10. 1905년, 일본 재정고문 메가타에 의해 추진된 사업은?
→ 화폐정리사업

Q11. 이 사업은 ( 백동화 )를
( 금본위 일본 제일은행권 )으로 교환해주는 사업이었다.



6️⃣ 토지 수탈의 제도화

Q12. 1908년, 일본이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는?
→ 동양척식주식회사



7️⃣ 상권 침탈에 맞선 경제적 저항

Q13. 외국 상인의 상권 침탈에 맞서 설립된 상회사 2곳은?
→ 대동상회, 장통회사

Q14.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연 단체는?
→ 독립협회

Q15. 시전 상인들이 결성하여 상권 수호운동을 전개한 조직은?
→ 황국중앙총상회



8️⃣ 민중 중심의 경제 자주 운동

Q16. 국채보상운동은 ( 대구 )에서 시작되었으며,
( 서상돈 ), ( 김광제 ) 등이 발의하였다.

Q17. ( 대한매일신보 ) 등의 언론이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나,
( 통감부 ) 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계호(1754-183)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


개항기복습



조선, 열강 속으로 끌려가다 — 조약, 침탈, 그리고 저항의 시대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외세에 문을 열었다.
이 문은 스스로 연 것이 아니었고, 그 문 너머에는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침탈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약은 조선의 주권을 하나씩 갉아먹었고, 이에 맞선 민중의 저항 또한 이어졌다.
이 글은 그 시대를 조약과 역사적 사건의 흐름에 따라 공무원시험준비를 하며 복습한 기록이다.
검정고시, 한능검시험 준비에도 도움이된다



1. 강화도 조약(1876) — 조선 외교의 시작, 굴욕의 문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자주국임을 명시했지만 실질적 주도권은 일본에 있었다.

조약은 부산을 포함한 항구 개항, 해안 측량권,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후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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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 서구와의 첫 외교 조약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구 국가와도 수교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청나라의 알선으로 1882년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에는 거중조정 조항, 관세 자주권 인정, 최혜국 대우가 포함되었으며,
이후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유사한 조약이 잇따라 체결된다.




3.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 — 임오군란 이후 청의 경제 간섭

같은 해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내정을 간섭하게 된다.
이후 조선은 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다.

이 조약을 통해 청 상인은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청 상인의 활동 범위는 개항장을 넘어 조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4. 조일통상장정 개정(1883) — 관세 자주권과 방곡령 인정

1882년 조미조약에서 관세 자주권이 조선에게 인정된 것을 계기로,
일본도 형평성을 요구하며 조선과 기존 통상 규정을 개정하게 된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 개정을 통해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관세 부과 규정을 명문화했고,
식량 부족 시 곡물 수출을 금지할 수 있는 방곡령 발동 권한도 확보했다.

이는 불평등 무역 구조를 부분적으로 완화한 사례였지만,
일본 상인의 경제 침투는 여전했고 중간 상인의 몰락도 계속되었다.




5. 아관파천(1896) — 열강의 이권 침탈 신호탄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피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증하고, 열강은 경쟁적으로 조선 정부에 이권을 요구한다.
러시아는 삼림 채벌권과 절영도 조차를 요구했으며,
미국은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조약에 포함된 최혜국 대우 조항은 각국이 조선에 동등한 이권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6. 절영도 조차 저지 — 만민공동회의 저항

1898년 러시아가 부산의 절영도를 장기 임차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이에 반대하며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대중 집회를 연다.

시민들은 조차는 곧 영토의 상실이라며 반발했고,
결국 고종은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게 된다.

이는 근대적 공론장 형성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7. 황무지 개간권 철회 — 보안회의 민권운동

1904년, 일본은 조선의 황무지를 개간하겠다는 명목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다. 이는 사실상 토지 침탈 시도였다.

이에 보안회는 서명운동과 언론 캠페인을 벌이며 반대했고,
국내 여론의 압박 속에 일본은 해당 요구를 철회하게 된다.

이 사건은 민간 주도의 성공적 토지 주권 수호 사례로 기록된다.




8. 화폐정리사업(1905) — 금융 주권의 상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1905년부터 일본 재정고문 메가타에 의해 화폐제도까지 장악당한다.

백동화를 회수하고 일본의 금본위 제일은행권을 유통시키는 화폐정리사업이 추진되었다.
조선 상공인들은 큰 환차손을 입고 줄줄이 파산했으며,
조선의 금융 시스템은 사실상 일본 식민 체제로 편입되었다.




9.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1908) — 토지 수탈의 제도화

일본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조직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토지를 수용·분할하고 일본인에게 저가로 불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토지조사사업과 연결되며 조선 농민은 대량으로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10. 상권과 경제를 지키려는 민간의 저항

외세의 상권 침탈에 맞서 조선 상인들도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대동상회, 장통회사 등 상회사를 세우고,
시전 상인들은 황국중앙총상회를 결성해 철시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경제적 이권을 지키려는 상인의 연대이자,
자생적 근대 경제 운동의 시초였다.




11. 국채보상운동(1907) — 민중의 자주 경제 운동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국민 성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서상돈과 김광제가 발의했고,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일제 통감부는 이를 탄압했고,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자주권 회복을 향한 민중 의식의 분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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